조선시대 부부의 편지글, 그 재미난 역동을 보다
작성자 정보
- 샌코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11,887 조회
- 0 추천
- 목록
본문
변신원(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
우리는 흔히 삼종지도 칠거지악의 가부장적 문화가 유사 이래로 계속되어 온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성평등은 우리네 전통문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서구 페미니즘의 열풍으로 이식된 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초기 부부가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우리의 남녀관계가 참으로 역동적이고 아기자기함을 알 수 있다. 오늘은 그 편지를 소개하며 우리문화의 격조를 느껴보도록 하자.
16세기 중반 홍문관 부제학의 벼슬에 올랐던 미암 유희춘과 그의 아내 송덕봉(1521~78), 이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자. 유희춘은 “목민관으로 부임해 타지에 홀로 머무르는 3~4개월 동안 여색을 전혀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알라”며 자랑하는 편지를 아내에게 보낸다. 16세기에 이런 편지를 보낸 것도 새롭지만, 아내의 답장은 심지어 뜻밖이다.
“무릇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성현의 밝은 가르침인데, 3~4개월 동안 독숙(獨宿)을 했다고 고결한 체하여 은혜를 베푼 기색을 하시오, (중략) 당신은 아마도 겉으로 인의를 베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하오. 나도 또한 당신에게 잊지 못할 공이 있소. (중략) 나는 옛날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할 순 없다!”라고 하였소. 갚기 어려운 은혜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오. (후략)“
부인이 이렇게 조목조목 따지자 미암은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 없다!'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미암은 참 자상하고 개방적인 남편으로 아내가 먼 길을 갔다 오면 다과를 준비해 10리밖까지 마중을 나갔고, 아내의 몸이 아프면 휴가를 내, 곁에서 직접 간호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라에 특별한 구경거리라도 있으면 친정에 머물며 함께 사는 딸을 데리고 나가 아내가 꼭 볼 수 있도록 했고 아내가 집밖에 머물러야 할 일이 생기면 항상 아들이나 사위를 미리 보내 방을 따뜻하게 데워놓고 기다리도록 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그동안 아내가 지은 시와 글을 모아 <덕봉집(德峯集)>이라는 문집을 내주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시대 때 부부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하지만 미암의 일기를 보면 남편에게 순종하며 기죽어 사는 옷고름 씹어무는 여인이 아닌 남편과 벗의 관계를 유지하며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호방했던 여인, 송덕봉의 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가부장적으로 군림하는 권위적인 남편의 모습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에 한참 모자라는 부부상이 얼마나 많은가. 조상의 멋과 기품을 느낄 수 있는부부의 모습이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첫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에 대응하여 국가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 둘째, 양반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강화된 유교적 지배질서 때문으로 17세기 이후인 조선후기에나 시작된 것이다. 5천년 역사에서 그렇게 오래된 전통이 아닌 것이다. 남녀가 서로 존중하고, 여성의 모성을 인류 재생산의 기능으로써 존중해온 전통은 오히려 우리가 서양보다 앞서 있다.(미암할미, 바리데기, 삼신할매를 생각해보라.)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 남성의 해방을 선언하고 점차 무산자와 장애인의 권리를 인정하여 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참정권은 1941년에야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민족이야말로 존중과 배려의 양성평등 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뭔가 자랑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출처: wikitree.co.kr
우리는 흔히 삼종지도 칠거지악의 가부장적 문화가 유사 이래로 계속되어 온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성평등은 우리네 전통문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서구 페미니즘의 열풍으로 이식된 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초기 부부가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우리의 남녀관계가 참으로 역동적이고 아기자기함을 알 수 있다. 오늘은 그 편지를 소개하며 우리문화의 격조를 느껴보도록 하자.
16세기 중반 홍문관 부제학의 벼슬에 올랐던 미암 유희춘과 그의 아내 송덕봉(1521~78), 이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자. 유희춘은 “목민관으로 부임해 타지에 홀로 머무르는 3~4개월 동안 여색을 전혀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알라”며 자랑하는 편지를 아내에게 보낸다. 16세기에 이런 편지를 보낸 것도 새롭지만, 아내의 답장은 심지어 뜻밖이다.
“무릇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성현의 밝은 가르침인데, 3~4개월 동안 독숙(獨宿)을 했다고 고결한 체하여 은혜를 베푼 기색을 하시오, (중략) 당신은 아마도 겉으로 인의를 베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하오. 나도 또한 당신에게 잊지 못할 공이 있소. (중략) 나는 옛날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할 순 없다!”라고 하였소. 갚기 어려운 은혜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오. (후략)“
부인이 이렇게 조목조목 따지자 미암은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 없다!'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미암은 참 자상하고 개방적인 남편으로 아내가 먼 길을 갔다 오면 다과를 준비해 10리밖까지 마중을 나갔고, 아내의 몸이 아프면 휴가를 내, 곁에서 직접 간호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라에 특별한 구경거리라도 있으면 친정에 머물며 함께 사는 딸을 데리고 나가 아내가 꼭 볼 수 있도록 했고 아내가 집밖에 머물러야 할 일이 생기면 항상 아들이나 사위를 미리 보내 방을 따뜻하게 데워놓고 기다리도록 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그동안 아내가 지은 시와 글을 모아 <덕봉집(德峯集)>이라는 문집을 내주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시대 때 부부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하지만 미암의 일기를 보면 남편에게 순종하며 기죽어 사는 옷고름 씹어무는 여인이 아닌 남편과 벗의 관계를 유지하며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호방했던 여인, 송덕봉의 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가부장적으로 군림하는 권위적인 남편의 모습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에 한참 모자라는 부부상이 얼마나 많은가. 조상의 멋과 기품을 느낄 수 있는부부의 모습이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첫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에 대응하여 국가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 둘째, 양반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강화된 유교적 지배질서 때문으로 17세기 이후인 조선후기에나 시작된 것이다. 5천년 역사에서 그렇게 오래된 전통이 아닌 것이다. 남녀가 서로 존중하고, 여성의 모성을 인류 재생산의 기능으로써 존중해온 전통은 오히려 우리가 서양보다 앞서 있다.(미암할미, 바리데기, 삼신할매를 생각해보라.)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 남성의 해방을 선언하고 점차 무산자와 장애인의 권리를 인정하여 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참정권은 1941년에야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민족이야말로 존중과 배려의 양성평등 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뭔가 자랑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출처: wikitree.co.kr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