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교회가 안식교를 이단이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 1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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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교측
안식일교회는 종교 개혁의 정신을 계승한
정통 복음주의 교회이다.
지난 호에 대한 반증
노예 문제에 대한 화잇의 언급에 대하여
[교회와 신앙]측은 주제와 논리가 빈곤한 탓인지 계속 엘렌 화잇의 문제에만 골몰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교회와 신앙]은 1월호에서 엘렌 화잇의 책 [초기 문집] 283쪽을 인용하여 노예와 그 주인에 대한 화잇의 견해를 비판하였고, 필자는 초기 문집 283쪽을 확인해 본 결과 그러한 내용이 없어서 영문 283쪽을 살펴보았으나 그곳에도 없기 때문에 출처를 다시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교회와 신앙]측은 마치 여러 날 굶주린 사자가 무슨 대단한 먹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황당한 주장" "사기꾼" 등등의 표현을 사용해가며 크게 흥분하고 있다. 필자는 그후, 시간을 내어 [초기문집](1993년판)을 앞뒤로 살펴본 결과, 279, 280쪽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지난 3월호에서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였다. 중요한 인용문에 대해서는 그 글이 기록된 책의 출판 연도를 밝히는 것이 상식인데, [교회와 신앙]측에서 그 연도를 밝혀두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와 신앙]측은 엘렌 화잇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노예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 말에 대하여 매우 노엽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겠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가 못받는가?" 못 받는다면 엘렌 화잇의 말이 맞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면, 기독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는가?
조용기 목사 문제에 대하여
필자가 장로교 통합측에서 한 때 조용기 목사를 '사이비'로 규정했다가 나중에 '해벌'한 내용과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바 있다. [교회와 신앙]측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대답을 계속 회피하면서, 이제와서는 이흥선 목사의 안식일교회에 대한 입장을 거론하고 있다. 이흥선 목사는 분명히 한 때 안식일교회를 이단시했다. 그러나 그가 안식일교회 [기본교리 27]과 변증서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를 연구한 결과,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이 일반 기독교의 구원론과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여 안식일교회가 정통 기독교회임을 천명한 것이다.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을 밝히 이해하게 된 것이 이흥선 목사가 입장을 바꾼 근본 원인이다.
그렇다면, 장로교 통합측은 조용기 목사의 어떤 면이 '사이비'성으로 판단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변화로 '해벌'을 하게 되었는지도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그것을 밝히지 않고 계속 다른 쪽으로 대화를 끌어가는지 모를 일이다.
수준 이하의 변증논리
[교회와 신앙]의 변증 논리는 일과성 내지는 임기응변식이다. 현재의 상황만 어떻게 넘겨보자는 식이다. 필자는 2월 호에서 영혼 불멸 사상이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교회 안에 스며들게 되었는지 비교적 상세히 설명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교회와 신앙]은 이러한 부분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반론이나 변증을 제시하시 못하고 다음과 같은 말로 독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안식교측에서는 영혼멸절['영혼불멸'이라는 말을 잘못 기재한 것 같음] 교리가 이교 철학 사상에서 나왔다고 비판하였다. 심지어 나사로 비유도 애굽의 민속설화에서 왔다는 것이다. 얼마나 불신앙적이요 무지한 소리인지 모르겠다. 이런 소리는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며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무식한 이방인이나 하는 소리다"(3월호, 128쪽).
[교회와 신앙]은 이러한 방식의 논리를 가지고 상대방이나 독자들의 감성에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지 말고, 독자들의 수준을 존중하여 좀더 이성적인 논리로 대처해 줄 것을 당부한다.
안식일교회 배경 이해를 위한 기독교 역사
말틴 루터의 종교 개혁과 교파의 발생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그 대학의 성서 신학 교수였던 말틴 루터가 당시 가톨릭에서 시행하고 있던 면죄부 판매를 비롯한 여러 가지 교리의 부당성을 지적한 95개 조항이 발표되면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원래 의도는 다른 교파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 내의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반박한 루터의 95개 조항은 종교 개혁과 개신교회를 탄생시키는 불씨가 되었다.
종교 개혁이 시작되면서, 중세 종교 암흑 시대 동안에 가톨릭의 교권에 의해서 변질되고 변형되었던 수많은 교리들이 성경으로 밝혀지고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성경으로 판단하자(sola scriptura)는 것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정신이었다. 그 결과 많은 교리들이 성서적으로 정리되었고 올바른 교리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종교 개혁의 여파로 또 다시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성경의 새로운 교리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각기 다른 주장을 가진 개신교 교파들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경이 하나이기 때문에 개신교회는 하나의 교회로서 발전되어 나갔어야 마땅한 것인데, 여기에도 인간적인 이기심들이 작용하여 교파의 난립 현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다음의 도표는 이런 모양으로 발생된 개신교 주요 교파들의 발생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분산된 각 교파들이 강조하는 주요 가르침들은 물론 성경을 중심으로 개혁된 교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분이시고 성경이 하나이므로 교회도 하나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잠 4:18)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원만한 광명으로 세상에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주요 기독교 교파는 300개 이상으로 난립되어 있으며, 한국의 경우, 장로교회 교파만 하더라도 100개 이상을 헤아리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분립의 원인인가? 교리인가, 아니면 인간의 감정, 혹은 권력 다툼의 결과인가?
세상에 이렇게도 많은 교회와 교파가 서로 대립된 상태로 존재하여 서로 자신의 교회가 진리와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 모든 교회들이 비성서적인 부분을 포기하고 성서적인 부분을 수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비성서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천주교회가 하나이듯이, 순수한 성서적 진리로 만들어진 개신교회도 하나이어야 한다.
19세기 초 유럽의 정세와 재림 운동
당시 유럽 지역의 정세는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9세기 초반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구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는 대변동의 기간으로 여러 가지 기대와 불안이 교차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일부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예언과 새로 시작될지도 모르는 복천년의 상관성를 찾아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특히 1798년 나폴레옹의 부하 베르띠에 장군에게 교황 비오 6세가 프랑스로 잡혀가 옥사하는 사건은 당 시대의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기도 했다.
천주교회가 세상을 지배했던 그 종교 암흑시대라고 하는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성경상의 명백한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적 재림 사상은 상당히 퇴색되어 있었다. 심지어 오리게네스나 아우그스티누스 등과 같은 교부들은 재림을 정신적인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1천년 이상 계속되던 종교 암흑시대가 끝난후, 인쇄술의 발달과 성서공회의 설립으로 성경이 대량으로 출판되어 자유롭게 읽혀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성경에 300회 이상 언급되어 있는 재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별히 재림과 관련된 성서의 예언에 대하여 많은 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였다.
"1800년대의 많은 개신교 성경 주석가들은 1260년간의 교황권 시대가 1790년대 안에 이미 끝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예언적인 관심은 성경상 최대의 예언 기간인 2300일 문제로 이동되고 있었다"(오만규, 재림교회사, 20,21). 다니엘 8장과 9장의 2300주야 문제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사람들로는, 독일의 칼빈파 개신교 목사인 요한 페트리(Johann Petri)를 비롯하여 아일랜드 평신도 한스 우드(Hans Wood), 독일의 목사 요한 벵겔(Johann Bengel)등 여러 명이 있었다.
1790년대에 가톨릭 '예수회'에서 추방당한 승려 마누엘 라쿤자가 저술한 책자 "영광과 위엄 중에 임하는 메시야의 재림"은 저자가 사망한지 10년이 지난 1812년에 스페인에서 출판되어 남부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 상당한 선풍을 일으켰다. 영국의 교회들도 라쿤자의 저서에 영향을 받아 1820년대부터 재림 운동이 일어났다. 영국의 재림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로는 죠셉 울프(Joseph Wolf)와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을 들 수 있다.
유럽 내륙에서도 제네바의 가우센(S.R. Gaussen), 독일의 리히터(J. Richter), 켈버(L. Kelbler), 루츠(J. Lutz) 등에 의해 재림 기별이 전파되었다. 스웨덴에서는 국교회 목사들이 재림에 대하여 무관심한 반면, 평신도들이 개인들의 집이나 숲속 집회를 통해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의 재림을 증거하였다. 특히 1842년과 1843년에는 6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포함된 청소년들이 재림 기별을 전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여 많은 어른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기도 했다. 호주에서는 플레이포드(T. Playford)에 의하여, 그리고 인도에서는 윌슨(Wilson)에 의하여 재림 신앙이 고취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재림 운동들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였던 2300주야 예언에 대한 해석이 여러 방향(1837년, 1843년, 1844년, 1847년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결집된 힘으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유럽에서도 이미 2300주야 예언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초 미국에서의 재림운동
19세기로 접어들 무렵, 미국에는 개신교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럽보다 청교도적이고 경건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경향이 다분하였다. 미국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과 유럽으로부터의 이민 증가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종교의 다원화 현상과 함께 신생 종교운동을 촉진시켰다. 거의 모든 종파가 미국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당시 미국의 종교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후복천년설', 즉 복천년이 지난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고 하는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그리고 그 복천년이 미국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1789년 북미 대륙에서는 죠지 와싱톤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미국은 그때로부터 1829년 앤드류 잭슨 대통령 취임까지를 "호의의 시대" 혹은 "초기 국민 시대"라고 부른다. 이미 언급한대로 낙관적인 '후복천년' 사상이 당시 미국의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미국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미국 개신교의 행동주의는 신앙 부흥운동, 사회개혁 사업, 평화 및 절제운동, 인도적인 구호사업, 일요일 준수 운동, 교육 개혁 사업 등으로 나타났다"(오만규, 상동, 28).
그러나 1830년대에 들어오면서 "호의의 분위기"는 점차로 약화되고 논쟁적 분위기가 서서히 감돌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개신교도들의 복천년설에 대한 기대감은, 다음의 네 가지 요인들 때문에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① 미국내의 분파주의적 대립 - 당시 미국내의 분파주의의 긴장은 지역감정, 노예제도, 반(反)가톨릭적 민족주의, 연방 정부와 주(주) 정부와의 대립 등으로 더욱 날카로와 지고 있었다.
② 경제공황 - 1837년에 몰아닥친 경제 공항은 복천년을 기대하는 미국 개신교도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요소였다.
③ 개인주의의 발전 - 호의의 시대에 활발히 전개된 신앙각성운동 및 신앙부흥운동은 국민의 개인주의를 발전시켰다. 신앙부흥운동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난 사실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경적 진리이며, 국교주의건 비국교주의건 간에 개인의 양심과 결단이 소속 교단의 신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개인주의적 신앙이 많이 강조되었고 그 결과 신생 종교 운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④ 재림에 대한 성경 연구 - 유럽의 프랑스 혁명은 개신교회의 종말론적 사상에 자극을 주었다. 유럽에서 시작된 이 종말론적 자극은 예수 재림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얼마 후에 미국에서도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재림 연구에 종사한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임박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복천년이 지난 후에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후(後)천년설'을 부인하고, 복천년이 시작되기 전에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전(前)천년설'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전천년설'의 유력한 대변인 중의 하나가 바로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였다.
윌리암 밀러의 재림 운동
윌리암 밀러가 2300주야를 해석하기까지
윌리암 밀러는 1782년 2월 15일 미국 마사추셋츠 핏츠필드의 한 경건한 침례교회 가정에서 16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대학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상당한 식견을 가진 독서가였으며 매우 규모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 때 볼테르(Voltaire), 페인(Paine), 흄(Hume) 등의 자연신론에 쏠려 청소년 시절의 종교적 확신을 상실하였다.
그는 군(軍) 생활을 통하여 여러 가지 인간사들을 경험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그 결과 자연신론적인 확신도 흔들리게 되었다. 그가 참전했던 영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과부인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로우 햄튼(Low Hampton)으로 돌아갔다. 아직 종교적 확신은 없었으나, 어머니를 생각해서 외삼촌이 목회하는 시골 침례 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하였다.
1816년 10월 12일, 밀러는 교회의 한 집사의 요청으로 이사야 53장을 주제로한 설교문을 낭독하던 중에 참을 수 없는 강렬한 감동을 경험하고 정식으로 교회에 입교하였다. 그후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조롱하는 친구들에게 적절한 답변을 제시하고 자기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하고자 하는 결심을 가지고 조직적인 성경 연구에 착수하였다.
2년에 걸친 집중적인 성경 연구 끝에 밀러는 예수의 재림은 복천년 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년기가 시작되기 전에 있을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니엘 9장의 70주일은 다니엘 8장의 2300일 기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2300주야 기간은 주전 457년에 시작하여 1843년 마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2300주야가 마치는 1843년, 즉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단 8:14)는 것을 예수의 재림으로 해석하여 적용한 것이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밀러의 예언 해석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매우 치밀하게 전개되었으나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고 하는 마지막 부분의 적용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2300주야에 대한 예언 해석은 이미 1월호에 게재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밀러의 재림운동 전개(1831년∼1842년)
밀러가 2300주야에 대한 예언을 해석한 뒤, 그 기별을 전해야 된다는 책임감이 계속 그의 양심에 부담을 주었으나, 농부라고 하는 자격지심과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13년간이나 내면적인 갈등을 겪으며 살았다. 그러다가 1831년 자신의 서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만약 어떤 곳에서든지 강연 초청이 오기만 하면 가서 전하겠다"고 하나님과 약속을 했다. 그는 비록 하나님과 약속은 했지만, 아마도 55세나 된 자기에게 강연을 부탁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마음으로 의자에 않은지 30분이 채 못되어, 그 동안 성경연구에서 발견한 재림 기별을 전해달라는 처남의 전갈을 가지고 조카가 찾아왔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하였다. 그날 오후 드레스덴(Dresden)으로 떠나 다음 날엔 누이 집 부엌에서 이웃의 가정들을 모으고 재림의 기별을 증거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재림 운동의 시작이었다. 첫 집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주민들의 요청으로 한 주일을 더 체류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한 결과 12가정이 주님께 헌신하였다.
그 부흥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집 근처 포울트니(Poultney) 침례 교회로부터 강연 초청장이 와 있었다. 그때부터 사방 각지에서 강연 초청이 쇄도하였으며, 1833년 9월에는 그가 사는 지역의 한 침례 교회가 그와 상의도 없이 그를 목사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목사로 호칭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1834년 이후 밀러는 그의 모든 시간을 재림 기별을 전파하는 일에 바쳤다. 이리하여 재림을 위한 개인적 준비에 비중을 두는 초교파적 재림 운동이 전개되었고 여러 교회로부터 밀러를 좇는 무리가 나타났는데, 이들을 "밀러주의자"(Millerites)라고 부른다.
밀러 운동은 단순한 시기파 집단의 운동이 아니었다. 재림의 시기가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2차적인 문제였고 1차적인 문제는 백성들로 하여금 재림을 맞을 준비를 갖추게 하는 신앙부흥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이 초교파적인 운동의 결과, 1844년에 감리교회는 4만명, 침례교회는 4만 5천명의 새 신자를 얻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재림운동의 위기와 절정
1843년이 가까이 올수록 밀러주의자들의 선교적 노력은 한층 강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한 기성교회의 반대와 탄압도 강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 운동의 지도자들은 동료 신도들에게 각자 자기가 속한 교회에 충실히 다니면서 재림 기별을 전파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재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성교회의 탄압이 더욱 커지게 되어, 결국 재림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출교되거나 이탈해 나오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예상했던 재림의 때가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밀러주의자들은 다각적인 방법으로 구체적인 재림의 날자를 정하고자 시도하였다.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서, 1843년 2월 10일설, 4월 3일설, 10월 24일설 등 여러 날자가 정해졌었다. 얼마 후에는, 주전에서 주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영(0)년이 없는 것을 감안하지 않았음이 밝혀져 2300주야가 끝나는 해는 1843년에 1년을 더하여 1844년이 된다는 결론을 다시 얻었다. 그리하여 다시 재림의 날자가 1844년 3월 21일과 4월 18일로 정해졌으나, 그 두 날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재림을 기다리던 신자들에게 상당한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일어나 임박한 재림의 날을 계속 연구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회중교회 평신도였던 사무엘 스노우가 유대의 대속죄일인 7월 10일이 태양력으로 10월 22일에 해당함을 연구하여 재림의 날자가 1844년 10월 22일이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스노우의 이와 같은 주장은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되었고 급기야는 '제칠월 운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844년 10월 22일이 되기 직전에 거의 모든 밀러주의자들이 제칠월 운동에 가담하였다. 장사를 하던 밀러주의자들은 상점문을 닫았으며 직장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직업을 포기하였다. 야영회에서는 자복과 기도가 그치지 않았으며 가난한 신도들이 빚을 갚는 데 쓰도록 하는 거액의 희사금이 들어오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일부 농장들이 추수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으며, 도시에서는 출판물을 준비하여 나누어주는 일에 바빴다. 그 당시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대망' '출판' '준비' '헌신', 이 네 가지 요소가 그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나, 1844년 10월 22일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지나갔다. 재림을 기다리던 무리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대실망을 겪어야 했고, 비통하고 쓰라린 가슴을 안은 채 무엇인가 형용할 수 없이 난처한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누가 재림의 시기를 정했는가
1843년과 1844년에 절정을 맞았던 이 재림 운동에는 200여명의 목사와 5만여명의 평신도가 가담하였다. 교단별 분포율을 보면, 감리교회가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침례교회가 4분의 1, 그밖에 회중교회, 그리스도교회, 장로교회, 감독교회, 루터교회, 화란개혁교회, 퀘이커 교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상의 내용은, [오만규, 재림교회사, 1980, pp.18∼49]에서 발췌•요약된 것임을 밝혀둠>
일반적으로 안식일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식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분명히 믿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1차 재림은 1844년에 했고, 지금은 이제 제 2차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박영관, 이단종파비판1, 1990년판, 259).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였다고 확실히 믿기 때문에 재림교파라고 한다. 예수님의 1차 재림은 1844년에 했고, 지금은 제 2차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김순명, 이단 종파들의 정체, 1986년판, 43). 이러한 비판들은 역사에 대한 식견이 없는 비판자 자신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를 깊이 연구하지 않은 평범한 기독교인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재림의 날자가 정해진 상태에서 재림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당시에는 안식일교회는 아직 이 땅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때였다. 그리고 재림의 날자를 정했던 일단의 무리들은 위에 열거된 여러 교파들에서 나온 것이다.
안식일교회는 물론 윌리암 밀러가 확신을 가지고 전파했던 예수의 재림 사상을 매우 중요시하며 전파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식일교회가 재림의 날자를 정했다고 하는 논리는, 마치 천주교의 삼위일체를 같이 믿는 개신교회가 중세 시대에 종교 박해를 했다는 논리와 같이 당치도 않는 이론이며 전후가 맞지않는 괴변에 불과한 것이다.
안식일교회의 발생 과정
실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
안식일교회의 역사는 1844년 대실망의 경험을 딛고 일어선 진지한 성경연구가들로부터 시작된다. 밀러주의자들이 비록 재림의 날자를 정하는 과오를 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며 기다렸던 경건한 신앙인들이었고, 특별히 성경을 연구하는 데 남다른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1844년 대실망 이후 많은 사람들이 재림 신앙을 포기했지만, 여전히 성경을 연구하며 재림을 기다리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다시 진지하게 연구하였으며 예언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였다.
그들 중 대표적인 몇 사람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죠수아 하임스(감리교, 목사), 죠시아 릿치(감리교, 목사), 죠셉 베이츠(크리스챤, 선장), 찰스 핏치(장로교, 목사), 하이람 에드슨(감리교, 목사), 제임스 화잇(크리스챤 컨넥션, 목사), 토마스 프레블(침례교, 목사), 엘렌 화잇(감리교, 평신도), 레첼 프레스톤(제칠일 침례교, 평신도), 사무엘 스노우(회중교, 평신도). 이 밖에도 성공회, 루터교, 청교도 등 각 교단의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연합하여 범교단적으로 성서적인 교리들을 찾아 한 단체가 형성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모체가 된 것이다.
안식일교회의 기본 교리들
안식일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교파에서 여러 사람들이 나와 형성된 무리들로부터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각기 다른 교파들이 가지고 있는 주옥같은 성서적 교리들을 인간적 편견없이 하나로 모으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주교회가 안식일교회를 비판하는 부분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7일 재림교인 안식교의 교리를 보면, 여러 교회의 교리를 한두 가지씩 따다가 잡채를 만들어 놓았다는 느낌을 준다. 즉, 가톨릭 교회에서는 구원을 위한 각 개인의 협력의 필요를, 유다교에서는 토요일 안식일과 수입의 십분의 일 헌금과 돼지고기 금식 등을, 개신교로부터는 성서 유일 규범주의를, 뱁티스트파로부터는 유아 세례 부정과 침례 등을, 현대 위생학에서는 담배 커피 차 술의 배척 등을 따왔다"(기본스 저, 장면 역, 교부들의 신앙, 1990년판, 458).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안식일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피흘리며 찾아서 다듬어놓은 다음과 같은 성서적 진리들을 믿고 있다(신계훈,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pp. 500,501 참조).
① 루터의 개혁의 핵심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개혁 신앙을 실천하며, 교회의 머리로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인정하고 조적적 불멸과 부활 신앙을 받아들인다.
② 재세례파 개혁의 유산인 성인(成人) 신자의 침례, 정교분리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 수호, 죽은 자의 무의식, 재림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 평화 애호의 신앙을 받아들여 실천한다.
③ 메노나이트 재세례파의 세족예식을 성서적 의식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의 양심적인 평화 애호 신앙에 입각한 의료 봉사를 본받으며, 나아가 심령의 성결과 함께 육신의 성결을 위한 건강 생활을 위해 성경적인 위생법칙과 금주, 금연, 등 모든 분야의 절제를 강조한다.
④ 칼빈의 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성경적인 예배, 성경의 권위에 대한 절대 복종, 율법의 복음적 기능, 장로제도 등을 수용한다.
⑤ 회중파 청교도들의 값진 유산인 성경에 일치한 신앙과 경건한 생활, 정교분리,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신앙 양심을 존중하며 실천한다.
⑥ 침례교의 유산인 성인(成人)의 물에 잠기는 침례를 실천하고, 회중의 교회 행정 참여를 대의제를 통하여 반영한다.
⑦ 제칠일침례교의 값비싼 유산인 제칠일안식일을 준수하며 물에 잠기는 신자의 침례를 그대로 실천한다.
⑧ 웨슬리의 감리회 운동의 유산인 중생과 성결을 필수적인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며 성령의 사역 강조와 칼빈의 모순된 예정론을 성서적 신앙으로 대응한 것에 동감한다.
⑨ 구세군의 구호 봉사와 자선 사업을 통한 사회 참여를 본받는다.
⑩ 모라비아 형제회의 선교 신앙을 받아들여 지역의 제한이 없는 세계 선교 사엄을 추진한다.
⑪ 사도 시대 이래, 중세 교회를 거쳐 정통 개혁 신앙으로 이어진 바, 하나의 통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영원히 함께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⑫ 종교개혁을 마무리짓는 재림운동의 유산을 성서적 신앙으로 받아들여,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죄일 봉사를 확신하며, 지성소 봉사의 종결과 함께, 공개적으로 단번에 있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을 인류의 마지막 유일한 소망으로 확신한다.
⑬ 구속의 역사를 종결시키기 위하여 일으키신 재림 운동을 인도하기 위하여, 주시기로 약속한 예언의 은사를 남은 교회에 주신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예언된 대로 복음의 확실한 승리와 구속의 신속하고도 영광스러운 종결을 확신한다.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
인간의 편견과 무모한 교권주의는 상대방의 장점을 좀처럼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자기 교단이 가직고 있는 권리를 포기하면서 다른 교단에 수용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생리인 것이다. 수용은 고사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도 쪼개어 나누어서 끊임없이 교파를 만들어가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인간의 아집과 편벽된 경향을 감안해보면, 만약 1844년의 대실망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와같이 여러 교파들이 가지고 있는 성서적 진리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일을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0장에는 이러한 국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계 10:9∼11)
재림 운동 당시, 재림 신자들에게 매우 확고한 희망을 가져다 준 근거는 다니엘 8장과 9장의 2300주야 예언에 대한 해석이었다. 그것을 저들이 처음 받아들였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꿀맛 같은 기별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저들은 쓴 맛을 경험하게 되었다. 1844년의 대실망은 재림 신자들에게 참으로 견디기 힘든 쓰라린 경험이었다.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하는 계시록 10장의 마지막 절과 이어지는 계시록 11장 1절에 보면, 다시 예언하는 일이 '성전'과 관련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2). 그 쓰디쓴 경험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이, 성소 문제를 토대로 하여 성경 예언을 다시 연구하여 실망의 이유를 찾아내었다. 성소의 정결 사건은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 전에 있게 될 심판의 국면을 나타내고 있음을 깨달은 재림 신자들은 다시 재림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재림 기별을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언 해석에 대하여 분명히 [교회와 신앙]측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날자를 정하여 재림을 기다리다가 실패하는 일을 경영하시겠느냐'고 하면서 매우 심한 비판을 할 것이다(비판을 하려면 반드시 대안-장로교측의 해석-을 제시하기 바람).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주 인간의 위기를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험한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그들이 배워야 할 수많은 공과들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거대한 여리고 성을 점령한 그들이 조그만 아이성을 치는 일에 실패하도록 방치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함께 하실 수 없다는 교훈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1844년의 대실망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편견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진리를 하나로 모으기 위한 섭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교리적 발전을 계속하던 중 1860년, 제칠일 안식일을 존중하며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선교를 위한 조직체로 설립된 것은 1863년의 일이다. 따라서 안식일교회는 다른 어떤 교단보다도 예언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진실한 신앙인들을 향하여 곧은 기별과 함께 예언의 기별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에 대하여 거의 무관심한 일반 교회들과는 달리, 안식일교회가 예언의 말씀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이유는 다음의 성경절에 근거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7,10).
19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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