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의미 (The meaning of In the beginning) [출처] 태초의 의미 (The meaning of In the beginning)|작성자 장석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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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이사야 43:13).
성경의 많은 곳에는 “태초”에 대해 말씀 하시고 있다. 오늘은 성경말씀의 태초에 숨은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출애굽기 3:14). 스스로 계신 분은 소리일 뿐이다.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분께는 태초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태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중 셋째 날을 반드시 경험하여야만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셋째 날은 매우 중요하다.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창세기 1:11) 명하신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누가복음 8:11). 씨/밀씀을 우리의 심령에 심어 말씀에 깨달음을 입어야만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으로 설 수 있다.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13). 이 과목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인 진리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진리로 깨닫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 전서 2:4). 성경말씀의 주목적은 우리를 아들로 세워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는데 있다(창세기 1:26), 감추인 진리를 알아야만 아들로 세움 받아 율법에 자유할 수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깨달은 말씀은 진리의 성령에 의해 우리의 영으로만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13). 우리가 문자말씀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받게 되면, 깨달음의 말씀이 우리에게 태초가 되어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즉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매, 독생자 아들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된다.
율법(깨닫지 못한 문자말씀 포함)은 우리의 겉 육신에게 역사하며, 깨달은 말씀은 우리의 속 사람인 영에 역사한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기록된 말씀도 하나님이시요. 깨달은 말씀도 하나님이시다. 깨닫지 못한 말씀은 율법일 뿐이다. 깨달은 말씀은 진리이다.
율법과 진리는 서로 연결된 것이다. 반드시 율법을 통해서만 진리께로 나아 갈 수 있다. 성막의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증거궤 또는 언약궤]를 보자. 법궤는 진리의 말씀을 상징한다.
속죄소[시온좌] 위에 사이를 둔 두 그룹이 법궤를 덮고 있다. 두 그룹의 양쪽 끝은 하나님 자신을 묘사한다. 이 두 그룹이 한 덩이로 연결된, 이 끝과 저 끝은 율법과 진리를 의미한다. 바로 신구약의 문자말씀(율법)과 진리의 말씀을 의미한다. 율법은 시작이며, 진리는 나중이다(계시록 2:8). 이를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한다(계시록 1:8). 모세도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었다(민수기 7:89). 우리도 역시 각자의 성전 안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고린도전서 3:16). 깨달음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어야만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왜냐하면 성막은 우리의 몸의 완성을 비유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태복음 24:26).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은 신구약, 문자말씀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
말씀을 통해서만 천국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태초가 되실 때, 우리는 영생을 갖게 된다. 문자말씀이 우리의 육신에 있어야만 또 다른 차원의 말씀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태초 이전에 계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한다.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이사야 43:13). 태초는 제 삼일이 성취된 그 때를 가리킨다.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지식을 내려놓지 않은 한, 결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진리의 말씀]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진리의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1–4).
우리의 내면에 진리의 말씀께서 계시기 시작할 때에, 그 말씀이 우리에게 태초가 되어진다. 깨달은 말씀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좁은 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
#그리스도는#하나님의#비밀이다
[출처] 태초의 의미 (The meaning of In the beginning)|작성자 장석련
성경의 많은 곳에는 “태초”에 대해 말씀 하시고 있다. 오늘은 성경말씀의 태초에 숨은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출애굽기 3:14). 스스로 계신 분은 소리일 뿐이다.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분께는 태초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태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중 셋째 날을 반드시 경험하여야만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셋째 날은 매우 중요하다.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창세기 1:11) 명하신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누가복음 8:11). 씨/밀씀을 우리의 심령에 심어 말씀에 깨달음을 입어야만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으로 설 수 있다.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13). 이 과목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인 진리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진리로 깨닫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 전서 2:4). 성경말씀의 주목적은 우리를 아들로 세워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는데 있다(창세기 1:26), 감추인 진리를 알아야만 아들로 세움 받아 율법에 자유할 수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깨달은 말씀은 진리의 성령에 의해 우리의 영으로만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13). 우리가 문자말씀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받게 되면, 깨달음의 말씀이 우리에게 태초가 되어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즉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매, 독생자 아들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된다.
율법(깨닫지 못한 문자말씀 포함)은 우리의 겉 육신에게 역사하며, 깨달은 말씀은 우리의 속 사람인 영에 역사한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기록된 말씀도 하나님이시요. 깨달은 말씀도 하나님이시다. 깨닫지 못한 말씀은 율법일 뿐이다. 깨달은 말씀은 진리이다.
율법과 진리는 서로 연결된 것이다. 반드시 율법을 통해서만 진리께로 나아 갈 수 있다. 성막의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증거궤 또는 언약궤]를 보자. 법궤는 진리의 말씀을 상징한다.
속죄소[시온좌] 위에 사이를 둔 두 그룹이 법궤를 덮고 있다. 두 그룹의 양쪽 끝은 하나님 자신을 묘사한다. 이 두 그룹이 한 덩이로 연결된, 이 끝과 저 끝은 율법과 진리를 의미한다. 바로 신구약의 문자말씀(율법)과 진리의 말씀을 의미한다. 율법은 시작이며, 진리는 나중이다(계시록 2:8). 이를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한다(계시록 1:8). 모세도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었다(민수기 7:89). 우리도 역시 각자의 성전 안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고린도전서 3:16). 깨달음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어야만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왜냐하면 성막은 우리의 몸의 완성을 비유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태복음 24:26).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은 신구약, 문자말씀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
말씀을 통해서만 천국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태초가 되실 때, 우리는 영생을 갖게 된다. 문자말씀이 우리의 육신에 있어야만 또 다른 차원의 말씀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태초 이전에 계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한다.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이사야 43:13). 태초는 제 삼일이 성취된 그 때를 가리킨다.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지식을 내려놓지 않은 한, 결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진리의 말씀]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진리의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1–4).
우리의 내면에 진리의 말씀께서 계시기 시작할 때에, 그 말씀이 우리에게 태초가 되어진다. 깨달은 말씀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좁은 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
#그리스도는#하나님의#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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