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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교회가 안식교를 이단이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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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샌코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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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교측)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김  대  성
 
 
A. 지난호 [교회와 신앙]측 글에 대한 소견
  그 동안 안식일교회는 본 교회를 향한 비판이나 이단성 시비에 대하여 변증을 하거나 교리적으로  투쟁하는 일을 가급적 자제해 온 편이다. 그러나 최근 안식일교회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케이블 텔레비전 기독교 방송에 주주로 참여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계 일각에서 안식일교회 참여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있어, 일반 기성교회에서 본 교회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을 바르게 알리고자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던 중에 이러한 지상 토론도 갖게된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한 시비를 가릴 때 한 쪽의 의견만 듣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때로는 양 쪽의 주장을 다 들은 후에도,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주관적 편견 때문에 공정하기가 결코 쉽지 않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공의가 요청될 경우에 공정한 판단보다는 어떤 형태로든지 소위 '힘'이 라는 것이 작용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결론이 내려지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이라는 대원칙이 있으므로 보다 양심적이고 공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번 이 지상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독자들의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있기를 기대한다. 
  [교회와 신앙]측은 지난호에서 '기성교회가 안식교를 이단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제시하였다. 곡해된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세부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상세한 설명을 할 것이기 때문에, 이번호에서는 변증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토론에 임하는 필자의 의도는, 지난호에 이미 언급한대로, 모두가 함께 상대적 이단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이단'성 시비를 가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므로, 본 지면을 통해서 안식일교회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잘못 소개된 부분을 바르게 정리하여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B. 서론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는 구원론이다. 이 구원론이 잘못되어 있으면 다른 교리가 아무리 성서적이라도 그것은 이미 기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안식일교회도 다른 어느 교회 못지 않게 모든 교리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특히 구원론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런데, 혹자는 안식일교회가 십계명과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을 한다. [교회와 신앙]측에서도 안식일교회 구원관이 율법주의라하여 계속적인 비판을 가해 왔다.
  교회사 혹은 교리사를 더듬어보면 어느 교단이나 교파를 막론하고 한 교회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교리적 논쟁이 있게 마련이다. 성경은 변함이 없지만 교리는 수많은 논쟁과 회의를 통해서 수정되고 변형되어 현재에 이르는 것이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수정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교파의 교리를 비평하려면 '현재 무엇을 믿고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비평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비평하는 척도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신학이나 교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경이어야 한다.
  안식일교회도 역사적으로 교리적 논쟁이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1888년에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에서 있었던 교리 논쟁은, 그 이전까지 율법의 행위가 강조되던 구원론이, 믿음을 강조하는 구원론으로 돌아서는 대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본 교회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믿고 가르친다. 기독교 서회에서 발간한 그리스도교 대사전(1972년판, 928쪽)에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대하여 "믿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고 재림과 토요일 안식, 침례, 십일조 헌금을 강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C. 안식일교회의 구원관
  신약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죄인이고 그래서 구원이 필요하듯이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죄인이었고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원리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는가? 구약 시대가 율법 시대이기 때문에 행위로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구약 시대에도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구약성경 하박국 2장 4절에는 분명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것이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구약의 인물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가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구약의 구원관과 신약의 구원관은 그 근본 원리가 동일한 것이며 구원의 주체는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은 짐승의 희생이 드려지는 성소 제도를 통해서 그 모형적인 희생 제물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신약도 마찬가지로 구약의 상징적인 성소 제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 구원의 이치를 성경적으로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다(창 1:1; 2:7).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창조의 마지막 부분인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 분과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이 창조되전 까지의 모든 피조물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조건으로 만들어진 생활 환경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업은 사람을 만드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⑵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 영생할 수 있었다(창 1:27,28).
사람의 창조에 대하여 창세기 1장 27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에는 상당히 깊고 오묘한 의미가 있겠으나, 우선 단순하게 영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부여되었고 그 지향하는 방향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여 서로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생명과를 먹으며(창 3:22)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면서 영생할 수 있었다.

⑶ 그리고 사람에게는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다(창 2:16,17).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 즉 사람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인간의 선택적 의지에 달려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과 나무를 두신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이 자발적인 사랑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그 관계를 포기할 수도 있었다.

⑷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와 죽음을 선택하였다(창 3:6,7,19).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끊어졌고 인간은 죄를 알게 되었다. 인간 세계에 슬픔과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천연계는 탄식하였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⑸ 하나님께서는 죽음에 처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언약을 맺으셨다(창 3:15).
인간이 비록 불순종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었다. 범죄로 인하여 죽게된 인간을 다시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준비되었다. 그 계획은 우주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의 법이 훼손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죽음에 내어주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뱀(사단)에게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하는 희생,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인간의 구원을 예고한 것이고 "머리가 상하"는 패배는 이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온 사단의 영원한 멸망을 선언한 것이었다.

⑹ 그 언약을 따라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성육신(成肉身)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마 1:18-21; 갈 4:4). 
에덴 동산 어느 한 지점에서 죄인을 구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언된지 수 천년이 지난 어느 날, 팔레스틴 지방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 드디어 그 "여자의 후손"이 태어났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⑺ 예수께서 인간이 받아야 할 죄 값(사망)을 대신 지불하셨다(사 53장; 눅 23:46; 롬 5:8).
인자가 되신 예수는 죄없이 사셨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친히 보여주셨다. 결국 예수님은 무죄하신 중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대속(代贖)의 역사를 완성하셨다. 사망이란 죄의 결과인데 죄가 없는 분이 돌아가심으로 죄값을 지불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죄인들이 살게 된 것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

⑻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가 용서되고 영생할 수 있다(요 3:14-16; 요일 5:12).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 용서와 구원의 필요를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영역에 들어오면 죄를 용서받고 죄의 결과인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6-18).

⑼ 믿음를 가진 자는 회개와 용서와 거듭남을 경험한다(행 2:37,38; 요 3:3-5).
믿음을 가진 자들이 갖게 되는 경험의 영역이 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믿음을 가진 사람은 우선 회개의 경험이 필요하다. 자신이 죽을 죄인임을 깨닫고 용서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준비되었음을 믿고 용서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죄가 용서되고 새 사람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의식이 바로 침례 예식이다. 세례라고 하는 의식도 있으나, 성경적으로는 물에 잠기는 침례 예식이 올바른 방법이기 때문에 안식일교회에서는 성경의 방법을 따라서 입교 의식으로 침례를 행한다. 로마서 6장 3-5절을 보면, 침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 의미를 모두 부여할 수 있는 침례가 성서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세례'라고 번역된 헬라어 '밥티스마'(        )는 "잠근다" "적신다" "빠지게한다"에서 나온 말이다.

⑽ 천국의 시민들은 천국의 법칙을 따라서 산다(빌 3:20,21; 마 7:21-2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늘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천국의 시민이 된 증거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인 것이다.

⑾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성장을 경험한다(딤전 4:7,8; 엡 4:14,15).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훈련 과정에서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성장 과정에서 실패와 좌절이 반복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다시 일어나서 전진한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⑿ 예수께서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이다(요 14:1-3; 살전 5:23).
성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예수께서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데리러 오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준비 상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벧후 3:10-12). 이와 같은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D. 믿음과 행함의 관계
  기독교인들 중에 '믿음'과 '행함'(혹은 '율법')을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면 믿음과 행함은 결코 상반되는 견해가 아니라 상호 보완하여 온전케 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구원의 경험을 말할 때에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행함'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극단(極端)이 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그 극단에서 조금만 더 지나치면 이단(異端)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적으로 보면 행함만을 강조하는 사람, 믿음만을 강조하는 사람, 모두가 이단으로 쉽게 빠질 수 있는 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갑'과 '을' 두 성경절들을 비교해 보자.
<갑1>"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을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갑2>"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16).
<을2>"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24,26).

  우리는 이 상반되는 듯한 성경절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린 것인가? 성경 말씀에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다만 성경이 기록될 당시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교리적 배경, 신앙의 습관들, 영적인 상태 등에 따라서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 특히 변론을 위하여 성경을 사용할 때에는 성경 전체의 흐름과 전후 문맥들간의 관계, 기록된 배경 등을 면밀하게 살펴서 인용할 때 편견과 실수를 줄일 수 있게 된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원리를 설명할 때에 아브라함의 예증을 사용하였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 4:3). 그런데 믿음과 함께 행함도 필요하다는 진리를 소개하는 사도 야고보도 아브라함의 예증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느 편에 손을 들어 주어야 마땅한가? 우리는 결코 상반될 수 없는 이 두 사실을 조화시켜야 한다.

  믿음을 많이 강조한 바울은 그 믿음과 행함을 이렇게 조화시킨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 "(고전 9:25,2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을 이렇게 조화시키고 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E.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을 율법주의라고 비판하는 내용에 대한 변증
  일반적으로 안식일교회의 구원관을 율법주의라고 비평하는 사람들은, 행함과 순종을 강조하는 안식일교회의 가르침, 안식일 준수, 건강식 위주의 식생활 습관 등을 지적하고 있다. 안식일 문제나 건강식 문제는 별도의 주제로 다루어질 것이므로 그 때에 상세한 설명을 제시할 것이다.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혹은 자기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율법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본 교회에서 발행되는 서적들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마치 안식일교회가 극단적인 율법주의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것 처럼 기독교의 복음은 분명히 믿음과 행함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가르침들 중에서 어느 한 쪽 면에 대한 기록만을 모으면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잠시 후에 언급하겠지만, 장로교회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행함을 강조하는 부분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 부분만 모아 인용하면 장로교회도 율법주의 구원관을 가진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 비판 자료 사용의 모순
  비판자들은 주로 본 교회 엘렌 화잇(엘렌 화잇에 대하여는 다음 호에서 다룰 것임)의 글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는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의 근본 사상을 떠나서 독자적인 해석을 하지 않는다. 흔히 인용되는 다음의 인용문들도 다 성경의 개념에 근거한 것들이다.
▶ "심판에 설 준비를 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안된다. 이 계명은 심판의 때에 품성의 표준이 될 것이다"(대쟁투 합본, 484) 
▶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의 백성에게서 완전히 재현될 때에 그는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강림하시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61). 
▶ "우리의 품성 가운데 점이나 흠이 있는 한 우리 중 아무라도 하나님의 인을 결코 받지 못할 것이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2권, 596).
  이러한 부분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 성화의 부분을 강조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칭의를 강조하는 다른 인용문들도 얼마든지 있으며 그것들만을 모으면 전혀 다른 개념도 성립될 수 있다.
▶ "죄인은 오직 범죄한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대속을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의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받을 자가 없다. 죄인은 다만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망과 부활의 공로를 통해서만 죄와 율법의 정죄와 범죄의 형벌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 믿음이야말로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며 신앙이란 믿는 것 뿐 아니라 신뢰하는 것을 포함한다"(가려뽑은 기별 1권 490). 
▶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입혀지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교회증언 5권, 219).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죄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인용문들이 풍부하게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매우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화를 강조하는 부분의 인용문들만 사용하여 논리를 전개하면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으며 자체 모순에 빠질 위험성도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한다면 성경에서도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도 심판을 강조하는 내용(신약에만 심판이라는 용어가 79회 나옴)이나 계명에 대한 순종과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절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 계명에 대한 순종과 행함이 강조되고 있는 성경절들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 "…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율법과 심판
   1950년 이래로 장로교회의 교리상 표준이 되어 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면 명백히 율법과 행함을 강조하는 내용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화, 율법, 심판에 관한 내용을 몇 가지 발췌하여 소개한다. 
▶ <제13장 성화 1항>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된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 <제13장 성화 3항> "그 전쟁(육체와 성령사이-필자주)에서 그 남아있는 부패한 부분이 당분간은 상당히 우세할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는 영으로부터 힘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음으로써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 되며, 그리하여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
▶ <제19장 하나님의 율법 2항> "이 율법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도, 악에 대한 완전한 규칙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의 규칙으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의 형식으로 두 돌판에 기록하여 전달해 주셨는데,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본분을 포함하고 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본분을 포함하고 있다."  * 율법 3항에서는 십계명을 도덕법이라고 했음.
▶ <제19장 하나님의 율법 5항> "도덕법은,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영원토록 그것에 복종케 한다. …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 도덕법의 이같은 의무를 전혀 폐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화시킨다."
▶ <제33장 최후의 심판 1항>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심판하는 권세가 성부로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 날에 타락한 천사들이 심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살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자기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전말을 밝히고, 그들이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F. 결론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죄인에게 이르러오는 선물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러면 행함과 순종이란 무엇인가? 값없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식물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비와 햇빛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듯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롬 8:3,4) 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천국 백성이 된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을 의지할 때에만 그리스도인 생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를 하지 않기 위해 신사 참배를 거절하다가 끝내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우리는 율법주의자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십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을 율법주의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회의 분열상, 타락상, 이와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은 무엇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가? 물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들이 있겠지만, 한국 교회가 대체적으로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채 인본주의 신앙, 기복 주의 신앙에 기울어져 경건한 그리스도인 생활면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경시하여 순종하지 않은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열성이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한국의 교회들이, 어서 속히 다시 한 번 거듭나서 순결한 교회, 경건한 생활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발휘하는 개벽의 역사가 속히 일어날 것을 염원하는 바이다.


5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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