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2부(The Third Day-Part 2) [출처] 셋째 날 2부(The Third Day-Part 2)|작성자 장석련
작성자 정보
- none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4,182 조회
- 0 추천
- 목록
본문
적어도 기독교인 이라면, 창세기 1장에서 2장 2절까지, 반드시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의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감추인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일장에 감추인 말씀들은 놀랍게도 인간의 구속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역사 중 “셋째 날”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선입관에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셋째 날에 대해선 NAVER에 이미 기고한바 있다. 셋째 날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나는 조금도 피곤해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스스로 육체를 입고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본이 되셨다(요한복음 13:15). 그분은 사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고, 직접 천국을 공개해 주셨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감추인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부활이 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지? 막연할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부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감추어 두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날 것이라 말씀 하시고(누가복음 24:46), 그분은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 나셨다. 이를 “예수의 부활”이라고 마태복음 27::53에서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립보서 3:1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하고 있지 않는다. 부활은 현실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 22:32). 죽은 자에 대해선 “영, 혼과 육”을 설명할 때 이미 말씀 드린바, 영이 깨어나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를 또한 잠자는 자라고 표현한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5:14). 잠자는 자, 죽은 자, 산 자에 대해 성경은 묘사하고 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8:22).
셋째 날을 설명하기 전에 첫째, 둘째 날을 잠시 고찰 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것이 천지(天地), 즉 하늘과 땅이다. 태초의 의미는 이미 기고된 바 있다. 태초란 셋째 날, 즉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받는 “그 날”을 의미한다. “하늘”이란 우리의 내면세계를 의미한다. 또한 이 내면세계를 우리의 속 사람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영이 있는 곳이다. “땅”이란 우리의 외면세계를 의미한다. 또한 이 외면세계를 우리의 겉 사람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육신을 의미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천지와 만물(창세기 2:1)을 우리 안에다 이루시는 것임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첫째 날을 묘사하기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 [성령]은 수면에 운행하신다” 한다. 이는 우리의 영적 상태를 비유한다. 우리의 육신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깨닫게 할 진리의 성령(요한복음 16:13)이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 갈 수 없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요한복음 1:1).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세기 2:3). 이 빛은 우리가 영접할 수 있는 참 빛 (요한복음 1:9), 보혜사,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복음 14:17). 참 빛을 받기까지는 우리의 내면은 혼돈, 공허, 흑암일 뿐이다. 진리의 성령에 조명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 흑암을 보게 하신다. 이것이 첫째 날의 의미이다.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은 말씀을 깨닫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둘째 날을 묘사하기를 “물과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신다” (창세기 1:6).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또한 가르침을 상징한다. 이에 대해서는 책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God's Mystery That Is Christ)”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성막은 뜰, 성소로 구성되며, 성소는 휘장을 드리워 엄격하게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다. 궁창 위와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어진 것은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나누어 드리운 성막 안의 휘장과도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여호와의 언약궤(법궤)는 지성소 안에 있다. 법궤는 진리의 말씀을 의미하며. 반드시 휘장을 열어야만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가르침을 받고 사느냐에 따라 그 가르침이 궁창 위의 물이 될 수도 있고, 또 궁창 아래의 물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7). 첫째 날에 진리의 성령을 받아 진리의 말씀을 인식하게 되면, 둘째 날에 이르게 된다. 인식 되어진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세상 가르침을 나눌 수 있게 되는 차원이 둘째 날의 의미이다. 궁창 위의 물은 깨달음의 말씀인 “진리의 말씀”이다.
셋째 날에 하나님께선 궁창 아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고 뭍(땅)이 드러나라 명하신다. 이 드러난 뭍[땅]이 셋째 날에 도달한 각 사람의 내면의 마음상태이다. 궁창 아래의 물은 우리가 광야교회에서 배워서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가리킨다. 이 드러난 뭍[땅]에 하나님께서 명하신다.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창세기 1:11). 각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목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마른 땅에 씨를 뿌려야만 한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누가복음 8:11). 우리는 반드시 씨/말씀을 우리의 마른 땅에 심어 열매 맺는 과목을 낼 수 있어야만 한다. “열매 맺는 과목”이 하나님의 뜻인 진리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짓 가르침을 진리라고 우긴다면 결코 우리의 내면은 마른 땅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선 우리를 지으셨고, 그분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는(고린도후서 5:17),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야만 한다. 벌거벗은 자가 되어 그분의 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되면, 하나님 앞에 열매 맺는 과목이 된다. 진리의 말씀을 가진 자를 열매 맺는 과목에 비유한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브리서 4:13).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드러날 것이다. 목숨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 땅에서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사후에 심판대 앞에서 일까?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디모데전서 5:24).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시편 89:48).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다. 우리의 영이 잠자고 있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에서 잠자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심겨진 씨/말씀에 빛의 조명을 받아 심겨진 말씀이 진리의 말씀으로 부활하게 될 때, 우리의 부활이 있게 된다. 진리의 말씀만이 우리의 잠자는 영을 깨운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고린도전서 15:23). 부활과 강림은 같은 의미이다.
말씀을 깨달을 때, 우리의 영이 깨어나게 된다. 오직 우리의 영으로만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18).
[출처] 셋째 날 2부(The Third Day-Part 2)|작성자 장석련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스스로 육체를 입고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본이 되셨다(요한복음 13:15). 그분은 사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고, 직접 천국을 공개해 주셨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감추인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부활이 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지? 막연할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부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감추어 두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날 것이라 말씀 하시고(누가복음 24:46), 그분은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 나셨다. 이를 “예수의 부활”이라고 마태복음 27::53에서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립보서 3:1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하고 있지 않는다. 부활은 현실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 22:32). 죽은 자에 대해선 “영, 혼과 육”을 설명할 때 이미 말씀 드린바, 영이 깨어나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를 또한 잠자는 자라고 표현한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5:14). 잠자는 자, 죽은 자, 산 자에 대해 성경은 묘사하고 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8:22).
셋째 날을 설명하기 전에 첫째, 둘째 날을 잠시 고찰 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것이 천지(天地), 즉 하늘과 땅이다. 태초의 의미는 이미 기고된 바 있다. 태초란 셋째 날, 즉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받는 “그 날”을 의미한다. “하늘”이란 우리의 내면세계를 의미한다. 또한 이 내면세계를 우리의 속 사람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영이 있는 곳이다. “땅”이란 우리의 외면세계를 의미한다. 또한 이 외면세계를 우리의 겉 사람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육신을 의미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천지와 만물(창세기 2:1)을 우리 안에다 이루시는 것임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첫째 날을 묘사하기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 [성령]은 수면에 운행하신다” 한다. 이는 우리의 영적 상태를 비유한다. 우리의 육신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깨닫게 할 진리의 성령(요한복음 16:13)이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 갈 수 없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요한복음 1:1).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세기 2:3). 이 빛은 우리가 영접할 수 있는 참 빛 (요한복음 1:9), 보혜사,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복음 14:17). 참 빛을 받기까지는 우리의 내면은 혼돈, 공허, 흑암일 뿐이다. 진리의 성령에 조명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 흑암을 보게 하신다. 이것이 첫째 날의 의미이다.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은 말씀을 깨닫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둘째 날을 묘사하기를 “물과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신다” (창세기 1:6).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또한 가르침을 상징한다. 이에 대해서는 책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God's Mystery That Is Christ)”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성막은 뜰, 성소로 구성되며, 성소는 휘장을 드리워 엄격하게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다. 궁창 위와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어진 것은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나누어 드리운 성막 안의 휘장과도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여호와의 언약궤(법궤)는 지성소 안에 있다. 법궤는 진리의 말씀을 의미하며. 반드시 휘장을 열어야만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가르침을 받고 사느냐에 따라 그 가르침이 궁창 위의 물이 될 수도 있고, 또 궁창 아래의 물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7). 첫째 날에 진리의 성령을 받아 진리의 말씀을 인식하게 되면, 둘째 날에 이르게 된다. 인식 되어진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세상 가르침을 나눌 수 있게 되는 차원이 둘째 날의 의미이다. 궁창 위의 물은 깨달음의 말씀인 “진리의 말씀”이다.
셋째 날에 하나님께선 궁창 아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고 뭍(땅)이 드러나라 명하신다. 이 드러난 뭍[땅]이 셋째 날에 도달한 각 사람의 내면의 마음상태이다. 궁창 아래의 물은 우리가 광야교회에서 배워서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가리킨다. 이 드러난 뭍[땅]에 하나님께서 명하신다.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창세기 1:11). 각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목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마른 땅에 씨를 뿌려야만 한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누가복음 8:11). 우리는 반드시 씨/말씀을 우리의 마른 땅에 심어 열매 맺는 과목을 낼 수 있어야만 한다. “열매 맺는 과목”이 하나님의 뜻인 진리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짓 가르침을 진리라고 우긴다면 결코 우리의 내면은 마른 땅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선 우리를 지으셨고, 그분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는(고린도후서 5:17),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야만 한다. 벌거벗은 자가 되어 그분의 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되면, 하나님 앞에 열매 맺는 과목이 된다. 진리의 말씀을 가진 자를 열매 맺는 과목에 비유한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브리서 4:13).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드러날 것이다. 목숨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 땅에서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사후에 심판대 앞에서 일까?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디모데전서 5:24).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시편 89:48).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다. 우리의 영이 잠자고 있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에서 잠자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심겨진 씨/말씀에 빛의 조명을 받아 심겨진 말씀이 진리의 말씀으로 부활하게 될 때, 우리의 부활이 있게 된다. 진리의 말씀만이 우리의 잠자는 영을 깨운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고린도전서 15:23). 부활과 강림은 같은 의미이다.
말씀을 깨달을 때, 우리의 영이 깨어나게 된다. 오직 우리의 영으로만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18).
[출처] 셋째 날 2부(The Third Day-Part 2)|작성자 장석련
관련자료
-
링크
-
이전
-
다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