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무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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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었인가?
창세기 일장에 묘사되고 있는 창조의 날들은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 가를 보여 준다. 특히 창조의 역사중 셋째 날을 깨달아야만 믿음을 이해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오용하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의 믿음이란 단순히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참 의미를 알아야만 한다.
믿음은 진리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믿음”은 교회에 참석하거나 믿음 생활을 오래 한다 하여 저절로 얻어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으로 돌아와 정기적으로 말씀을 읽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분의 형상으로 창조하신다(창세기 1:26).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함을 입는 과정은 점차적이다. 신생아는 자라면서 엎치다가 앉게 되고 기게 되고 걷게 된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이, 여러 단계를 거쳐서 성장하게 된다.
믿음의 성장은 네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 단계로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를 비유한다. 이 단계에 있는 동안에, 우리는 양심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우리의 양심에 심어 놓으셨기 때문이다(전도서 3:11). 우리의 영적 여로의 시작도 비유로 홍해를 건너서 광야교회로 들어와 모세의 율법 (문자말씀-깨닫지 못한 문자말씀은 율법이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둘째 단계의 신앙으로서, 교회와 같은 조직을 통해서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을 찾게 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이르기 전 무릇 사십 년을 광야에서 보내게 된다. 거리상으로 보아 사십 년은 엄청나게 긴 세월이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불뱀과 전갈에 봉착함으로서 (신명기 8:15), 요단강을 건너 약속된 땅에 이르는 것이 지연될 수 밖에 없었다. 불뱀과 전갈은 사람의 잘못된 가르침임을 비유 한다.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머문 후에 우리도 역시 상징으로 요단강을 건너 셋째 단계의 신앙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넷째 단계는 진리의 성령 안에서 우리의 영이 소생하게 되며, 진리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오직 우리의 영이 소생되어야 만이 약속된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교회를 걷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낮추시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게 하려 하심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로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신명기 8:3).
애굽을 떠나 광야교회에 있는 것은 아직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우리는 세상 지식과 진리의 말씀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이 둘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야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광야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내적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저 예수만 경배하고 있을 뿐이다.
홍해를 건너 광야교회에서 받은 가르침은 그리스도 도 (가르침)의 초보이다(히브리서 6:1).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에서 인간의 지혜로 성경의 문자말씀을 해석한, 사람의 가르침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두 번째 단계에 그냥 머물려 있을 수 밖에 없다. 사 복음서에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그 분께서 광야교회에서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마태복음 23, 마가복음 8:15, 누가복음 20:46, 요한복음 5:39-40). 우리는 반드시 사람의 가르침에서 성경말씀으로 돌아와 그 속에 감추인 그리스도의 진리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책에는 “셋째 날 신앙”의 중요성을 기재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셋째 날에 숨겨져 있다(창세기 1:9). 우리의 믿음의 목표는 셋째 날에 이르러 셋째 날 신앙이 성취되는데 있다. 셋째 날의 믿음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소생시켜 우리를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 6:2).
그들의 양심으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그럴지라도 이 사람들은 아직도 광야교회에 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은 반드시 제 삼 일에 이르러야만 한다. 절대로 광야에서 오래 머물면 아니 된다. 하나님의 문자말씀의 세상적인 해석을 우리의 마음에 우상으로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이 된다.
창세기 일장에 묘사되고 있는 창조의 날들은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장될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 달리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셋째 날에 마른 땅이 되게 하신 후,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고 명하신다(창세기 1:11–12). 마른 땅은 우리의 내면상태를 가리킨다. 열매 맺는 과목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마른 땅에 씨를 뿌려야만 한다. 씨는 항상 있는 하나님의 문자말씀이다(눅 8:11). 옥토에 심기운 씨는 반드시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신이 옥토가 되었을 때에 심기운 말씀은 반드시 자라 열매를 맺게 된다. 이 열매가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 (에베소서 3:4)이요, “하나님 비밀” (골로새서 2:2)이다. 이것이 셋째 날의 의미이다. 우리의 마음에 심기운 성경의 문자말씀에 깨달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다. 이 비밀이 그리스도의 진리이다. 문자말씀에 보여지는 깨달음의 말씀이 진리이다.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깨닫지 못한 문자말씀은 율법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3–4).
셋째 단계의 믿음은 세상의 가르침에서 성경말씀으로 돌아와 문자말씀을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심는 것 (히브리서 10:16)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성경의 문자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씨가 옥토에 심겼을 때에 싹이 나오는 것과 같이, 우리의 육신에 심겨진 문자말씀 역시 새롭게 싹이 나온다. 바로 육신에 기록한 문자말씀 안에 감춰진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될 때가 셋째 날의 성취이며, 비로소 넷째 단계의 믿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성경의 문자말씀이 진리의 성령에 의해 계시가 될 때 깨달음의 말씀이 보여진다. 깨달음의 말씀은 단체가 아닌, 각자가 개별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 깨달음의 말씀이 우리의 영에서 부활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 분이 부활하실 그 때에 우리의 영도 함께 깨어나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상태가 되기까지는 우리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이다(계시록 3:1). 넷째 단계의 믿음은 진리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일단 넷째 단계에 이르게 되면, 넷째 날과 아울러서 동시에 다섯째, 여섯째 날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31).
[출처] 믿음이란 무엇인가? (What is Faith?)|작성자 장석련
http://blog.naver.com/seoksoppe/220610321279
창세기 일장에 묘사되고 있는 창조의 날들은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 가를 보여 준다. 특히 창조의 역사중 셋째 날을 깨달아야만 믿음을 이해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오용하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의 믿음이란 단순히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참 의미를 알아야만 한다.
믿음은 진리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믿음”은 교회에 참석하거나 믿음 생활을 오래 한다 하여 저절로 얻어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으로 돌아와 정기적으로 말씀을 읽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분의 형상으로 창조하신다(창세기 1:26).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함을 입는 과정은 점차적이다. 신생아는 자라면서 엎치다가 앉게 되고 기게 되고 걷게 된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이, 여러 단계를 거쳐서 성장하게 된다.
믿음의 성장은 네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 단계로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를 비유한다. 이 단계에 있는 동안에, 우리는 양심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우리의 양심에 심어 놓으셨기 때문이다(전도서 3:11). 우리의 영적 여로의 시작도 비유로 홍해를 건너서 광야교회로 들어와 모세의 율법 (문자말씀-깨닫지 못한 문자말씀은 율법이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둘째 단계의 신앙으로서, 교회와 같은 조직을 통해서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을 찾게 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이르기 전 무릇 사십 년을 광야에서 보내게 된다. 거리상으로 보아 사십 년은 엄청나게 긴 세월이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불뱀과 전갈에 봉착함으로서 (신명기 8:15), 요단강을 건너 약속된 땅에 이르는 것이 지연될 수 밖에 없었다. 불뱀과 전갈은 사람의 잘못된 가르침임을 비유 한다.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머문 후에 우리도 역시 상징으로 요단강을 건너 셋째 단계의 신앙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넷째 단계는 진리의 성령 안에서 우리의 영이 소생하게 되며, 진리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오직 우리의 영이 소생되어야 만이 약속된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교회를 걷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낮추시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게 하려 하심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로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신명기 8:3).
애굽을 떠나 광야교회에 있는 것은 아직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우리는 세상 지식과 진리의 말씀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이 둘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야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광야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내적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저 예수만 경배하고 있을 뿐이다.
홍해를 건너 광야교회에서 받은 가르침은 그리스도 도 (가르침)의 초보이다(히브리서 6:1).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에서 인간의 지혜로 성경의 문자말씀을 해석한, 사람의 가르침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두 번째 단계에 그냥 머물려 있을 수 밖에 없다. 사 복음서에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그 분께서 광야교회에서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마태복음 23, 마가복음 8:15, 누가복음 20:46, 요한복음 5:39-40). 우리는 반드시 사람의 가르침에서 성경말씀으로 돌아와 그 속에 감추인 그리스도의 진리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책에는 “셋째 날 신앙”의 중요성을 기재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셋째 날에 숨겨져 있다(창세기 1:9). 우리의 믿음의 목표는 셋째 날에 이르러 셋째 날 신앙이 성취되는데 있다. 셋째 날의 믿음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소생시켜 우리를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 6:2).
그들의 양심으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그럴지라도 이 사람들은 아직도 광야교회에 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은 반드시 제 삼 일에 이르러야만 한다. 절대로 광야에서 오래 머물면 아니 된다. 하나님의 문자말씀의 세상적인 해석을 우리의 마음에 우상으로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이 된다.
창세기 일장에 묘사되고 있는 창조의 날들은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장될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 달리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셋째 날에 마른 땅이 되게 하신 후,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고 명하신다(창세기 1:11–12). 마른 땅은 우리의 내면상태를 가리킨다. 열매 맺는 과목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마른 땅에 씨를 뿌려야만 한다. 씨는 항상 있는 하나님의 문자말씀이다(눅 8:11). 옥토에 심기운 씨는 반드시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신이 옥토가 되었을 때에 심기운 말씀은 반드시 자라 열매를 맺게 된다. 이 열매가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 (에베소서 3:4)이요, “하나님 비밀” (골로새서 2:2)이다. 이것이 셋째 날의 의미이다. 우리의 마음에 심기운 성경의 문자말씀에 깨달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다. 이 비밀이 그리스도의 진리이다. 문자말씀에 보여지는 깨달음의 말씀이 진리이다.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깨닫지 못한 문자말씀은 율법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3–4).
셋째 단계의 믿음은 세상의 가르침에서 성경말씀으로 돌아와 문자말씀을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심는 것 (히브리서 10:16)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성경의 문자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씨가 옥토에 심겼을 때에 싹이 나오는 것과 같이, 우리의 육신에 심겨진 문자말씀 역시 새롭게 싹이 나온다. 바로 육신에 기록한 문자말씀 안에 감춰진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될 때가 셋째 날의 성취이며, 비로소 넷째 단계의 믿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성경의 문자말씀이 진리의 성령에 의해 계시가 될 때 깨달음의 말씀이 보여진다. 깨달음의 말씀은 단체가 아닌, 각자가 개별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 깨달음의 말씀이 우리의 영에서 부활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 분이 부활하실 그 때에 우리의 영도 함께 깨어나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상태가 되기까지는 우리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이다(계시록 3:1). 넷째 단계의 믿음은 진리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일단 넷째 단계에 이르게 되면, 넷째 날과 아울러서 동시에 다섯째, 여섯째 날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31).
[출처] 믿음이란 무엇인가? (What is Faith?)|작성자 장석련
http://blog.naver.com/seoksoppe/22061032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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