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co de Mayo’의 역사와 의미… 단순한 축제를 넘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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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5월 5일, 멕시코는 강력한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날은 오늘날 ‘Cinco de Mayo(5월 5일)’로 불리며, 특히 미국 내 멕시코계 커뮤니티 사이에서 널리 기념되고 있다. 하지만 이 날이 멕시코 독립기념일이라는 오해가 여전히 존재하며, 그 진정한 역사와 의미는 종종 잊혀지고 있다.
프랑스 침공과 푸에블라 전투
1861년, 멕시코 대통령으로 선출된 베니토 후아레스는 국가 재정 파탄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에 대한 부채 상환을 중단했다.
이에 대응해 프랑스, 영국, 스페인 해군이 멕시코 베라크루즈에 도착했지만, 영국과 스페인은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철수했다.
반면, 프랑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멕시코 영토를 점령하려 했다.
프랑스는 약 6,000명의 병력을 푸에블라 데 로스 안헬레스에 파견했지만, 후아레스는 약 2,000명의 병력을 조직해 방어에 나섰다. 전투는 해 뜰 무렵 시작되어 저녁까지 이어졌고, 프랑스군은 약 500명이 전사한 반면, 멕시코군의 사망자는 100명 이하였다.
이 승리는 군사적 의미를 넘어서, 유럽 제국주의에 맞선 라틴 아메리카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1867년, 미국의 정치적 압박과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프랑스는 결국 멕시코에서 철수했다.
미국에서의 의미 있는 시작
UCLA 의과대학 라틴계 건강문화연구소 소장인 데이비드 헤이스-바우티스타 교수는 저서 『El Cinco de Mayo: An American Tradition』(2012)에서 Cinco de Mayo가 사실상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멕시코계 주민들에 의해 시작된 민중의 기념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KTXL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Latino 커뮤니티는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 반대, 평등, 민주주의를 지지했으며, 멕시코의 승리를 듣고 캘리포니아, 네바다, 오리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하했습니다. 이들은 자유, 인권, 인종 평등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1950년대와 1970년대 치카노 운동에서도 이 날은 멕시코인의 저항과 자긍심을 상징하는 강력한 기념일로 받아들여졌다.
오해와 현실
많은 사람들은 Cinco de Mayo를 멕시코의 독립기념일로 잘못 알고 있지만, 멕시코의 진정한 독립기념일은 1810년 9월 16일이다. 헤이스-바우티스타 교수는 두 기념일의 차이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멕시코 독립기념일은 멕시코 영사관 중심의 공식 행사가 진행되지만, Cinco de Mayo는 처음부터 누구의 소유도 아닌 민중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기념하나?
미국과 멕시코 모두에서 Cinco de Mayo는 축제의 날로 기념된다. 퍼레이드, 전통 의상을 입은 무용 공연, 루차 리브레(멕시코 레슬링), 마리아치 음악 등이 행사에 포함되며, 전통 음식인 타코, 과카몰리, 츄러스, 그리고 푸에블라의 대표 요리인 몰레 포블라노도 빠지지 않는다.
다만, 5월 5일은 멕시코에서 공식 공휴일은 아니며, 대부분의 직장과 은행, 상점은 정상 운영된다.
잊지 말아야 할 의미
최근 수십 년간, 일부에서는 이 날을 ‘Drinko de Mayo’로 부르며 지나친 음주 중심의 상업적 행사로 변질시켰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에 대해 헤이스-바우티스타 교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Cinco de Mayo는 단순한 파티가 아닙니다. 이 날은 자유와 인권, 평등을 위한 싸움에서 비롯된 기념일입니다. 우리가 축하할 때도, 그 본래 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샌디에고에서 Cinco de Mayo 행사가 열리는 자세한 정보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https://www.sandiego.org/campaigns/spring-break/cinco-de-mayo.aspx
<사진출처: https://www.sandiego.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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